천주교성지가 되어버린 천진암의 불편한 진실 | 기타
수수리 2011.08.16 23:58

 

 

천주교성지가 되어버린 천진암의 불편한 진실

 

 

 

종교갈등으로 인해 일어나는 세계분쟁은 전체의 반을 넘는다. 종교갈등에 항시 노출된 외국 성직자들이 한국의 불교와 카톨릭이 잘 어울리는 모습에 놀라는 경우가 많다. 일부 개신교 근본주의자들과의 갈등을 빼면 우리는 종교간 화합이 잘 된다는 외부의 평가다.

 

일부 종교의 배타성과 종교 간 갈등이 일어나는 상황에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고 있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위안과 힘을 주는 시대가 아닌 요즘에 종교인들이 함께 자리한 것만으로도 훈훈한 광경을 보여주는 것도 없다.

 

 

 

 

 

                                                       * 길상사를 찾은 김수환추기경님을 법정스님이 반갑

                                                          게 맞이하는 모습 (사진- 경향신문)

 

 

잘 알려진 법정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의 깊은 우정만큼이나 불교와 천주교는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는 기본이 있어 오래전부터 소통이 잘 돼 왔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고 있다.

 

 

하지만, 종교간 이해 문제에 관한 현실은 다르다.

 

 

천진암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鶯子峰) 아래에 있는 사찰로 한국 천주교 성지(聖地)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천진암이 폐사지 였다는 주장은 천주교의 역사왜곡의 논란의 증거가 되고 있다.

 

 

                          

                                          *한국천주교의 발상지로 알려진 천진암 ( 사진- 경기일보)

              

 

아래는 <한국천주교발상지 천진암성지> 사이트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이중 몇가지 부분이 논란이 되고 있다.

 

 

「천진암은, 고조선 시대 제정일치의 관습으로, 본래 단군영정 천진을 모시고 산제사, 당산제, 산신제 등을 올리던 천진각 혹은 천진당이라는 작은 초가 당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며,특히 일부 선사시대의 석조흔적으로 추정되는 현상을 볼 때, 삼국시대 그 이전부터 소박한 토속신앙의 현장으로 여겨지며, 훗날 천진암이 되어, 1779년을 전후하여 폐찰이 되었었으니, 정약용 선생의 글에, "천진암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하나도 없다......요사체는 반이나 무너져 빈 터가 되었네 (사파무구관,루전요사반허구)" 하였고, 1797년 정사년 당시 홍경모의 남한지에서는, "천진암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사옹원에서 관리하고 있다(천진암위고사조지물금속사옹원)"고 함으로써, 사찰로서의 기능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성다블뤼 주교는 1850년 경 기록한 글에서, 이벽성조께서 젊은 선비들과 함께 수도와 강학을 하던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거처(폐가옥)이었다(l'edifice isole et perdu)고 하였다.」

 

 

 

천진암은, 고조선 시대 제정일치의 관습으로, 본래 단군영정 천진을 모시고 산제사, 당산제, 산신제 등을 올리던 천진각 혹은 천진당이라는 작은 초가 당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는 처음 단락부분은 단군을 천진(天眞)이라고 한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모습을 천진이라고 한 것이다.

 

정약용의 시에서 앞뒤 모두 생략하고 일부분으로 전체를 해석하거나 천진에 대한 해석이 자의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1779년 당시 이벽 성조 25세, 정약용 17세, 정약종 19세, 정약전 21세, 이승훈 22세, 이총억 14세, 권철신 44세, 등 주로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이상한 천주교 책을 읽고 토론하는 내용을 일반 유교 서당에서나 정상적인 사찰에서, 또는 일반 가정에서는 실천하기 어려우므로, 다블뤼 주교의 기록대로, 폐허가 된 천진암에서는 여럿이 모여 함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pour s‘y livrer ensemble a des etudes profondes),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니, 천진암은 바로 한민족의 유교 선비들이 불교 암자에서 천주교를 연구하고 실천하기 시작한, 유·불·천이 사람과 장소와 사상을 합류한 곳이고, 조선천주교회가 태동된 한국천주교 발상지이다.

 

 

1827년에 65세의 노인이 된 정약용 선생은 옛날의 동료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천진암을 찾아와 현장에서 지은 시에서, "이 곳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사이로 난 실같은 오솔길은 내가 어린 아이 적에 오르내리며 놀던 길인데(석아동시유), 여기서 우리는 중용, 대학, 서전, 주역, 즉 상서를 다 외운 후 불에 태워 물에 타서 마시는 소련을 하였었지(상서차소련)! 더우기 저명한 호걸들과 선비들이 모여 강학을 하고, 독서를 하던 곳이 바로 여기였지(호사석강독) !" 하며, 옛 추억을 회고하였다.」

 

 

 

 

지는 해 나무 끝에 숨고

잔잔한 연못 물빛 사랑스럽구나

.......................(일부 생략)

멀리 대 홈통으로 끌어온 작은 물방울들이

차고 넘치면 가만히 전답으로 들어가네

누가 이 좋은 언덕과 골짜기 가져다가

두어 명 스님들만 차지 하게 했던가

...............................(일부생략)

바위와 산봉우리도 기색을 거두고

울타리와 언덕은 구름 안개가 쌓였네

종소리 나자 스님들과 죽을 먹고

.....................

향은 꺼져 나구네와 함께 잠이 들었구나

슬픈일이지 옛적 현달한 이도

스님이 된 자가 다소 있었지

 

 

위의 시는 주어사와 천진암 강학회(1779년)가 시작되고 18년후 1797년, 다산이 36세된 단오날에 형제들과 천진암에 놀러갔다가 지은 유천진암기(遊天眞庵記)이다.

 

정약용이 시에서도 언급한것처럼 천진암에는 이미 스님들이 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89년 9월 발행된 월간 <대원> 제 28호 기사에 따르면 “가톨릭인들을 숨겨준 탓으로 관가에서 폐사시켰다. 천진암에서 수도하던 스님도 십여분 참형됐다.” 고 마을 노인들은 증언했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천진암 스님들 모두가 참살되었고 사찰은 폐사가 된 사실을 뒷받침한다.

 

 

천진암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발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62년 남상철에 의해 절터가 확인됐고, 1979년 수원교구 내 몇몇 신부들이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정약전의 주교요지(主敎要旨)에서도 가톨릭이 모였던 장소가 정확치 않아 논란이 분분한 가운데 후보지 가운데 하나였던 천진암은 수원교구에 의해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을 시작되게 되었다.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당시 천진암터에 사는 주민들의 땅을 사들이기 위해 “자신의 과수원에 들어가는 주민을 경찰에 고발하고, 외출 후 집에 돌아올때 수차례의 검문과 검색당하게 했다.” 그리고 사찰 신도의 소지품을 검사하는 등 정부의 협조를 얻어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한 것으로 기록 돼 있다.

 

그리고 천진암터에 있던 영통사에 대해 “광주시를 동원해 건축중이던 건물을 일방적으로 건축취소시키고, 예불소리가 시끄럽다고 고발하고, 밤에 건달이 사찰에 침입해 거주자를 위협하고, 신도들이 절 앞 개울에서 쉬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등 ”의 행동을 했다는 증인다.

 

또 가톨릭계가 추진한 ‘군립공원계획’에 반대한 주민들을 안기부와 경찰서가 조사했다는 내용으로 볼때, 가톨릭과 광주시의 조직적인 탄압이 지속된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34만여평의 땅을 사들인 변기영 신부측은 1979~81년에는 이벽·정약종·권철신·권일신·이승훈 등 한국천주교회 초기인물들의 묘소를 천진암터로 이장했으며, 1990년 영통사 주지 일영스님이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사찰에서 나옴으로써 천진암이 불교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1992년 서울신문에 ‘종교간의 갈등’ 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나기도 했지만, 종단에서는 개입하지 않았고 결국 절은 없어졌다.

 

 

 

진관스님, 불교왜곡에 대한 불교계의 무관심 반성과 역사바로세우기 촉구

가톨릭교는 참회와 역사 재조명에 앞장서길 주장

법현스님, 종교간 대화와 서로에 대한 철저한 교리이해 절실 주장

천진암 역사왜곡한 가톨릭측에 진실규명과 사과촉구하기도

 

 

 

 

이에, 종단협 불교인권위원장 진관스님은 “이렇게 불교에 대한 왜곡이 심한데도 관심조차 없었던 불교계도 반성하고 이제라도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서야 한다.” 며 “가톨릭교도 인권과 종교화합 차원에서 참회하고 역사를 재조명하는데 스스로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태고종 열린선원 주지 법현스님도 ‘가톨릭측의 천진암 역사왜곡’과 관련 불교신문(2267호 10월 7일자)에 특별기고 하기도 했다.

“세기말의 민중들이 항상 그리던 위대한 지도자를 맞이하는 꿈을 꿀 때마다 ‘나=지도자=메시아=부처님’의 말을 할 때마다 종교 간의 대화와 상대 종교의 교리에 대한 체계적 이해가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기독교(가톨릭교)에서 진행하고 있는 토착화 운동에 관심을 가지던 차에 변기영 신부님이 천진암을 성역화하시는 모습에 우리 천주교가 외국의 선교사 파견 없이 스스로으 필요성과 공부에 의해 출발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노력하심에 경외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명동성당처럼 어렵거나 외로운 사람들이 보호받던 곳이 천진암이었고 초기 가톨릭교도들이 천진암 스님들의 보호아래 배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일로 죄없는 스님들이 목숨을 빼앗기고 오늘날에 와서는 절까지도 없어진 것이 아니냐” 며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안내지도 및 설명서)의 전량회수와 공개적 폐기처분, 일부 내용 시정과 요청사항의 약속기한을 정해 응답을 요청하면서 불교계 종단과 함께 대응할 것을 밝혔다. .........(중간 생략) 그러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법현 스님은 “책자와 인터넷 그리고 석조물에 씌어 있는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주십시오.

단군을 천진(天眞)이라고 한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모습을 천진이라고 한 것입니다.

역사를 왜곡하지 마십시오.....스님들이 살던곳과 대웅전을 제대로 표시하고 복원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과 진실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주어사에 있던 해운스님의 비도 불교계에 돌려주십시오. 가톨릭을 믿는 이들이 많이 사는 나라 사람들에 의해 훼손된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성당의 성화(聖畵)가 성화 자체를 그리지 않는 이슬람인들에 의해 복원되고 있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시고, 천진암의 백년 뒤 좋은 모습을 우리 후손들과 세계인에 보여주실 것을 기대하겠습니다.”

 

 

이후, 1984년엔 한국천주교회 창시 200주년을 맞아 유적지들에 대한 대대적인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비, 순례대성당, 강학당, 갈멜 수도원, 가톨릭 신학연구소 등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