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문화탐방] 낮은곳에 임하여 섬김을 실천하는 인자들의 교회 문화/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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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곳에 임하여 섬김을 실천하는 인자들의 교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8)
1880년대 일제의 핍박에 힘들고 어려웠던 조선 민초들의 삶에 개화와 민족독립운동의 힘이 되어 주었던 많은 선각자들의 교회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
오랜세월 가장 낮은 곳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고자 했던 정동제일교회가 창립 125주년을 맞았다.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정동교회의 역사가 1992년 출간된것이 25년전이다. 지난 한 세기 우리 나라 기독교 역사와 함께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짚어본 서적 발간이었다.
▲ 교회 마당에 세워진 아펜젤러 흉상 (사진출처 © 뉴스파워)
고종황제의 의료와 교육사업의 허락받은 미국 감리 선교본부
아펜젤러 지금의 서울시 중구 정동34번지 최최 예배당 설립
고종황제로부터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들어온 세명의 미국인 선교사가 있었다.
장로교의 의사 알렌을 도와 광혜원에서 일했던 스크렌턴은 정동에 진료소를 개원하고 8개월만에 522명을 치료하여 고종황제를 감동시켜 시(施)병원이라는 정식이름도 하사받는다.
스크랜튼 부인은 최초의 부인병원인 보구여관(保球女館)을 설립하여 후에 동대문교회와 이화여대 부속병원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H.G 아펜젤러는 1887년 10월 9일 서울시 중구 정동 34번지에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베셀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다가 교인수가 급성장하자 500명 수용 가능한 예배당을 설립한다.
최초의 본격적 서양식 교회로 영국 빅토리아풍 고딕양식으로 소박하고 간결하다.
붉은 벽돌 예배당은 사적으로 지정됨,
우리나라 최초 파이프 오르간도 있어
예배당은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서양식 교회로 평면구조는 성단(聖壇) 부분에 익부(翼部)가 달린 십자형이다. 건물 양식은 영국 빅토리아풍 고딕식으로 내부의 천장은 평천장이고, 기둥은 아무런 장식없이 소박하고 간결하다.
예배당은 길이 77척 너비 40척 높이 25척으로 회당안에 좌우로 좁은 방 하나씩, 그 길이는 28척 너비는 14척 11평으로 설계되었다. 1척은 30.3센티미터이니 환산하면 그 당시로는 큰 건축물이었음을 알수 있다.
당시에는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 최대의 건물이었으나 1914년 교인수가 2천명 이상으로 늘어나자 1926년 모퉁이 주춧돌을 종각 남쪽 모퉁이 서편으로 옮겨놓고 동으로 10자, 남으로 14자, 함 60평형을 증축하여 175형 건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76년 문화공보부는 19세기 건축물인 붉은 벽돌 예배당을 사적 제 256호로 지정했다.
그리고 1979년에 새로 완공된 한국선교100주년 기념예배당은 한국건축가협회로부터 최우수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평양출신 기혼자로 이화학당을 졸업, 일본유학하여 여성으로는 첫문학사였던 하란사는 동양에서 세 번째, 우리나라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6. 25 전쟁으로 파손된 이후 93년에 다시 복원되기도 했다.
배재, 이화학당과 함께 한국 신문화와 신교육의 역할을 하기도하고
일제 시대 독립운동의 발원지가 되었다.
정동제일교회와 배재, 이화학당이 자리잡고 있는 정동 34번지 일대는 기독교 문화 유적지로 한국 신문화와 신교육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1885년 보구여관과 시병원이 있던 건물이 헐린 후에는 배재학당의 기숙사와 한국 최초의 민간 도서관인 종람관이 있었다. 이곳에서 한국 최초의 일간 신문인 독립신문과 매일신문이발간되었고, 이광수의 무정, 심훈의 상록수 등도 이곳에서 발간되어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광수, 김동인, 남궁억, 주요한, 전영택, 심훈 등은 밤낮으로 책을 읽고 토론하는 종람관독서회의 일원이기도 했다. 특히, 이곳에 있었던 배재학당 기숙사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아관파천 반대, 을사조약 반대, 그리고 독립운동까지 한국 독립운동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신앙위에 세워진 민족구국운동을 펼치다.
협성회와 독립협회 그리고 엡윗청년회를 주목하라.
서재필과 윤치호 그리고 유관순까지 우리 기억속에 남다.
교회 근처에는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이 있었고 교회는 이 학당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개화운동의 중심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대부분 이화와 배재의 학생들이어서 청년, 학생교회였기 때문이다.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주일학교 운동과 신앙훈련과 선교와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엡윗청년회 운동이 전개되었다.
엡윗청년회를 지도하고 프로그램에 직접 개입한 서재필과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중심인물이었다. 갑신정변으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귀국한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강의하면서 청년들의 사회참여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한다. 그리고 반일 민족독립운동을 병행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기도 했다.
당시, 독립협회는 정치적인 집단이고, 협성회는 계몽적인 집단이며, 엡윗청년회는 선교집단이었다. 집단들의 공통된 기초는 신앙 위에 세워진 민족구국운동이라는 것이다.
또한, 순한글 신문을 발행하고 민족문화의 주체성 확립과 민족을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3.1 운동때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이필주, 박동완 교인을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일제에 구속되었고, 정동제일교회의 애국청년운동은 독립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의 일화는 초등학생에게도 영원한 누나로 불리고 있다.
태극기를 품에 안고 정동예배당의 파이프 오르간 뒤에서 간절하게 기도했던 유관순은 신앙과 나라의 독립을 누구보다 열망했던 애국교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독립선언의 이념과 3.1운동의 진행 방향등이 모두 정동 예배당에서 시작되었고 교회의 정신과 함께 했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정동제일교회의 자랑이다.
봉건적 신분차별과 여성차별에 새로운 장을 마련하였고 일제의 억압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종교인의 의연함이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문화 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친 교육, 계몽, 의료, 선교사업등 다양한 분야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지난 125년의 역사를 뒤돌아보고 앞으로 다가올 새천년을 준비하는 감리교의 모 교회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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